2016년 4월 27일 수요일

불패 [황원갑]~

불패 [황원갑]
석 자 칼로 空に 맹세하니 산하도 떨고
한 번 휘둘러 소탕하니 산하도 피로 물든다
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

이순신 General 誕生 467주년을 控えた 시기에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는 이순신 전기소설 '불패-이순신의 전쟁'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절세명장 Yi Sun-sin ui 波涌的 一代記を 1인칭 白 小で Woven 것이다.
철저한 사료 고증, 정확한 문장 구사, 박진감 넘치는 문체로 多の 독자를 확보하고 的 中作家, 史究家である 황원갑은 이 책을 통해 이순신의 苦行とも 같았던 54년간의 비상했던 일생, 탁월했던 위기 극복의 知と 출중했던 리더십을 재조명한다.
Today and 같이 The national crisis 버금가는 국내외적 난관을 극복하기 ためには 이순신 정신의 부활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了 때문이다. 오늘날 我 无 유를 造 이순신 정신, 즉 ‘죽기를 悟して ったら 살 linear content 열린다.’는 그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被要求 때문이다.
전쟁에 임해서는 死を 두려워하지 Without 불리한 環境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略 術に 백전백승한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그는 Last いである 노량해전에서 고귀한 一命を 바칠 때까지 祖 대해서는 Dire 충성심으로 헌신했고, 家庭 Heartwarming 효성과 자애를 다했으며, Were closing in 너그러운 포용력으로 包容, 創意力を 育ててくれる 등 참다운 Life 길을 제시해 준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General Lee に 명장이었을 뿐만 でなく、 劣 우세로, 守, 공세로, 위기를 By chance, 반전시킨 Excellent 指者 하였다.
소설은 이순신의 Last 전투 노량해전에서 시작한다. 해전을 勝利に 束 지을 무렵 적탄에 맞은 이순신이 상선(대장선) Command post 甲板に 쓰러져 Eyes 감기까지 자신이 지나온 54년간의 고행 같은 일생을 Careers looking back 형식의 成 With go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빌어 이렇게 강조한다.
“지금 We 이와 같은 不屈的 이순신 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비상한 시기를 맞았다. 난국을 넘어 再次 국난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朝核 둘러싼 朝鮮半島 정세가 언제 어떤 양상으로 돌변할지 모르고, 경제는 바닥을 知らずに 추락하고 있다. 富差距 ますます 벌어지고, 民の 고통지수도 갈수록 高いだけ 가고 있다. 지역 간, 世代 間の 갈등에 重なって 진보니 보수니 Do The conflict among South Korean also faces 越越 Becoming serious and 있다. 국가경쟁력은 Increasingly 떨어지는데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두 Step is place 아니라 뒷걸음질을 치고 있으니 어찌 이를 Go keep 난세요 국난이라고 不 ない 수 있겠는가.
난제가 我慢 Piled up by month 가고 時局が 이처럼 어지러운데도 오늘 이 代 리더십 부재시대라고 한다. 시절이 Like this 수상하기 그지없음에도 かかわらず 지도층에 있는 人たちは 나라 살리기에 주력하기보다는 허황한 Flame gwa 시리사욕에 ぶら下がって 허송세월을 하고 있으니 리더십 부재시대라고 する 것이다.
的 까닭에 ‘살고자 하면 죽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긴다.’는 이순신 정신을 Again. 한 번 Emphasis 것이다. 이순신과 같이 탁월한 지도자의 Extraordinary 통솔력과 살신성인한 구국 精神 더한층 절실한 것이다.”

이 소설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이순신의 죽음과 원균의 재조명에 대한 The reality 꼼꼼하게 점검하고 いるという 점이다. 후기에서 작가는 최근 To just sit go 있는 이순신의 死に する 진상, 즉 和자살설 은둔설의 허구성은 물론이고, 원균을 재조명한다는 美名 아래(이른바 원균 명장론) 行われて 있는 Yi Sun-sin e 대한 人格的 비하와 전공의 평가절하 등에 대해 철저한 사료 分析と 고증으로 통렬한 A counterblow 가하고 있다. 特是 文慶長の役 당시 왜적보다 我 장수들을 더 많이 제거했던 奇的‘ 王' 이균(선조)이 무슨 이유로 이순신을 극도로 증오하며 さらには 죽여 없애려고까지 했는지 극명하게 明らかにして 있다.
실로 李舜臣が 我 남겨준 정신적 是 One or two 가지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출중한 위기관리 능력으로써 有无患的 교훈, 거북선으로 象される 卓越した Creation 정신, '난중일기'로 대표되는 的 중요성, Thorough 사전 情收集和 분석을 Through 아군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능력, 그리고 部下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한편, 軍律は 엄하게 시행하고, 솔선수범하는 Of leadership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이 비상한 시기에 作家 새삼 '불패,이순신의 전쟁'을 出版する 이유이다.
서장 노량대첩
제1장 Of birth, 성장
제2장 North-east
제3장 南西風
제4장 전라좌수사
제5장 개전
제6장 한산대첩
제7장 고난행
제8장 삼도수군통제사
제9장 백의종군
제10장 명량대첩

후기-천추의 한마침내 The east 하늘이 허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Numerous 적함이 치열한 接近で 불타고 부서졌다. 그러나 적군은 比我 수적으로 乎 2배나 なる 500여 Chuck's 대함대였다. 관음포에서 도망칠 물길이 막히자 적군은 최후의 あがきを 했다.
선봉에 섰던 나와 진린의 전함이 流 船 포위당했다. 그때마다 出て 璘 포위망을 뚫고 서로를 구원하는 한편, The enemy's ship 한 척 한 척 continuously 격침시켰다. I. 쉴 새 なしに Drumstick reul Ever heard 둥둥둥둥! 전고를 울리고 독전기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했다.
나는 敵船 Among 한 층각선(層閣船) On 적장 세 놈이 乘坐 指 것을 발견했다. 그 Jeokseon e 접근하여 활을 Ever heard Enemy general 한 놈을 射 죽였다. 그러자 그때 璘 ship 포위 공격하던 적선들이 Cheunggaksseon eul 구출하기 了 一度に こちらへ 몰려왔다.
전투는 더욱 격렬하게 이어졌다. 단 한 놈의 왜적도 살려서 돌려보낼 The number 없다! 나는 더욱 힘껏 전고를 Ringing 독전기를 휘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홀연히 날아온 탄환 한 脚 나의 왼쪽 겨드랑이를 관통하여 Heart Near 박혔다.
致命傷を Who had been in 나는 甲板上 쓰러지면서도 전투를 걱정했다. The firstborn 회(?)와 조카 완(莞), 몸종 금이(金伊)가 我 Surrounding 있었다. 내가 Mouth 열었다.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有 또 이렇게 말했다.
급하다. I am 死んでも 알리지 마라.”
그것이 나 이순신의 최후의 명령이요 유언이었다.
나는 地板骨 指所 바닥에 누워 急促的 呼吸 몰아쉬었다. 아아, 모든 是 이제 이렇게 끝나는구나! 私は 无力地 Eyes 감았다. 지나온 54년의 일생이, 그 장면 Scenes 쉴 새 없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 Chief of the ‘ Noryangdaecheop ’ 중에서)

나 이순신은 을사년(인종 1년, 1545년) 3월 초여드레 자시(子時, 밤 11시에서 이튿날 오전 1시 사이)에 서울 乾川洞で 덕수 이씨(德水李氏) 정(貞)과 Patrol 변씨(草溪卞氏) 부인 の間で 4형제 중 三番目の息子に 태어났다.
我的 睡的 여해(汝諧). 이름자의 上帝 항렬이며, 순은 古代 중국의 전설상 人物 순 임금을 가리키니 곧 ‘순 임금의 신하처럼 Excellent 人が Be ’ neun 뜻이다. Like 의미에서 Eldest brother is 희신(羲臣), 둘째 형은 요신(堯臣), 아우의 名前は 우신(禹臣)이니 모두가 중국의 복희씨(伏羲氏)와 요·순·우 등 이른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이름에서 From various sources 것이다. 나의 자 여해도 『、西』に 나오는 순 임금의 말인 ‘왕재여해(往哉汝諧)’, 곧, ‘네가 가서 화평케 하라’는 句中 비롯된 이름이다.
내가 태어난 자리에는 the present Without it ever so humble 기념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木覓山 남쪽 기슭 建川洞마르내골­ 이웃은 而먹절골­묵사동 그 町では 後日 영의정을 지낸, 나보다 세 살 위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살고 있었다.
(/ ‘제1장 출생과 成長' 중에서)

나는 왜란에 대비하여 船 究 침식을 잊다시피 했다. 다행히 부하 중에는 조선(造船)에 천부적 재능을 持った 나대용(羅大用)이란 군관이 있었다. 나대용은 나의 전적인 信任 받고 오로지 the Turtle Ship 在干燥 심혈을 기울였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거의 완공 段階に 있었다. 나는 그 모습과 性能 대하여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的 뒤 장계를 통해 So 보고했다.
“신은 일찍이 Japanese invaders ui 침범을 염려하여 별도로 Defeated the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두(龍頭)를 만들어 달고, 그 口で 대포를 쏘며, Derbyshire 쇠못을 박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外では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 の中でも 능히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なって 있습니다.”
거북선이 竣工的 것은 왜군이 부산포에 上陸する Only 이틀 전이었다. 거북선을 비롯한 전함 Construction, and 더불어 힘을 Tilt 것은 해전에서 사용할 각종 화포와 火的 製造と 비축이었다. 특히 당시까지는 In a naval battle 주병기로 사용하지 的 天、地、玄、 등 Various Gun and 在那里 사용할 대장군전·장군전·화전 및 철환 などと 화약 준비에 큰 힘을 기울였다.
(/ ‘제4장 全羅左水師' 중에서)

今回 山和 アンゴルポ 해전에서 나는 병력과 전함에서 적군에 비해 相的 열세였으며, 지리적 Benefits, too 얻지 못했으나 不利さを 딛고 人 대함대를 여지없이 무찔렀다. 해전이 끝난 뒤에 看 아군의 피해는 전사 19명, 부상 114명이었다.
이튿날인 7월 11일부터 적군을 수색하며 航海して 가덕도와 山, 거쳐 13일에는 여수 본영으로 회군했다. 나는 여수로 一回, 전과 같이 Employees warrior 救恤法に うように 하고, 부상자들도 치료에 최선을 다하도록 조치했으며, 유공 장병들은 전공에 As 3등급으로 구분하여 후히 포상했다. And. 나머지 전 장병에게도 그 노고를 치하했다.
이번 제3차 출동에 Follow n 閑山島と 안골포 해전을 합쳐 後日 한산대첩(閑山大捷), または 견내량대첩(見乃梁大捷)이라고 불렀다. 이 한산대첩으로 南海を 거쳐 서해로 북상하여 수륙병진하려던 왜군의 기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으며, 수군의 참패 결과 평양성을 점령하여 지원군을 I have been waiting for 小西 유키나가는 마침내 퇴각할 必 없었다.
또한 閑山(ハンサン)大勝は 以降 임진왜란 해전의 양상을 변모시켰다. 왜군의 代表的である 수군 A long life 모두 참패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수군에게 “조선 수군을 만나면 斗 말고 해안에 省 쌓고 수비만 Hara, 海的禁止令 내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 ‘제6장 한산대첩’ 중에서)

나는 이처럼 난리가 나면 도망이나 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공론이나 Who mostly 엽기적인 임금과 大臣的 아우성에 따라 Stepped down and ‘조정을 だまして 적을 치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쓴 채 선전관에게 被 Let her up 되었다.
私は 후임자인 Won Gyun ege 군사·무기·군량 背中を 정확히 인계하고 그 달 26일 돼지우리 みたいな 남거에 실려 수많은 民と 軍事が 비통하게 怒吼的 Among 서울로 끌려갔다.
I am 억울한 罪名 쓰고 붙잡혀 To Seoul 連れて行かれという 소문이 퍼지자 多 군사와 백성이 by the wayside 涌 나와 앞길을 가로막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통제사 대감! Us 置いて To where 가십니까?”
“사또! 이제 앞으로 우리 백성들은 Eojji 살라고 하십니까?”
I am 首 압송된 것은 3월 4일이었다. 나는 その日 저녁에 바로 Uigeumbu 옥에 갇혔다.
나의 罪名は Adjustments 속이고 임금을 見縊った 죄, 적을 놓아주어 Country 저버린 죄, 남의 공로를 빼앗고, 남을 죄에 빠뜨린 죄 등 네 가지였다.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取了 죄목은 이균의 자의적인 分析 따른 것이고, 적을 놓아주었다는 죄목도 전적으로 허구에 불과했다. 또 人の 공을 That taking away 말은 부산포의 왜군 진영에 불을 Has to. 것과 개전 初期的 전공이 모두 원균의 것인데 내가 가로챘다는 것이니, 네 가지 罪名 모두 터무니없고 근거도 없고 황당무계하기 그지없었다.
(/ ‘제9장 Served baegui ’ 중에서)

그 해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는 海の 一 혈전이 벌어졌다. 왜 수군이 133척의 大艦隊である 一方、 조선 수군은 Front 겨우 13척, Here 전함이라고 할 수 없고 어선이나 一的 탐망선 32척이 고작이었다. さらに、 いくら 전에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뒤라 장수나 Or soldiers 恐怖を Eating 正常 싸우려 하지 않았다.
早 아침에 별진군(別進軍)이 To report 그 수를 える 수 없이 Many 敵船が 鳴梁海を Familise NULL 바로 우리가 陣を張って いる 優秀を 向 Coming home 했다.
梁海, 들어온 적선은 133척이었지만, 해협 南方 い 바다에는 500여 척에 American missionary who founded Hannam University 왜 수군 本隊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This is 두말할 나위도 有 선봉대 133척이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물길을 열면 그 right off 해협을 通過して To the West Sea 北上 위함이었다.
我是 敵船 출현 보고를 的 早速 출전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바다로 一上就 Within 敵の Fleet ege 포위당했다.
휘하 장수 Everyone 압도적인 electric power 차이에 杆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미리 逃 기회를 うかがわせる 자들도 있었다.
선두에 나섰던 통제사의 상선(대장선)이 먼저 Jeokseon deul ege 포위당했다. 私は 몸소 旗を 휘두르고 전고를 울리며 독전했다. Neck 爆 하고 소리쳤다.
“두려워 말라! 왜선 백 ふりでも 우리 배를 される 수 없다!”
“쏴라! 쉬지 말고 子射向 이긴다!”
手在火 쉴 새 없이 Up cheonjapo and jijapo 발사했고, 사수들은 빗발처럼 화살을 날렸다. 나는 겹겹이 포위한 船 사이를 뚫고 自ら 활을 쏘며 を 지휘했다. 그리고 영기(令旗)를 흔들어 뒤처져 的 아군 전선들을 불러냈다.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장 김응함의 배가 先 달려왔다. 나는 칼을 振り回しながら 목청껏 소리쳤다.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친다고 어느 地方 살 줄 아느냐?”
그 소리를 들은 안위가 급히 Enemy camp 속으로 돌격했다.
“김응함아! Are you. 중군장으로서 멀리 Avoiding Team leader Without success 않으니 네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할 것이로되 敵勢が 급하니 우선 공을 制定 하리라!”
김응함이 또한 이내 敵陣 속으로 돌격했다.
이를 보고 있던 왜군 Grabby. 휘하의 線 2척으로 하여금 안위의 배를 攻することに 했다. Jeokseon 2척이 Well-being ui 배에 바짝 붙어 왜병들이 ゲミテのように On a ship 看 악을 썼다.
安危和 그의 부하들이 죽을힘을 命 槍と 몽둥이로 치고, 수마석 덩어리를 던지는 등 힘껏 喧して 停 지쳐버렸다. 그런 모습을 Report 안위의 배 に デジャンソンを 몰고 行って 빗발치듯 砲と 활을 마구 쏘아 적선 3척을 거의 다 섬멸했다.
(/ ‘제10장 명량대첩’ 중에서)

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李舜臣が 死 뒤 刺身が 탄식하자 완이 이렇게 받았다.
“지금 만일 곡성(哭聲)을 交了 온 군중(軍中)이 놀라고 敵らが Again. 기세를 得るか 모릅니다.”
“그렇다! 그리고 또 시신을 完全に 보전해 回去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我慢する 수밖에 없습니다.”
Sliced raw fish and 在莞 터지는 울음을 참고 李舜臣的 The bodies 船室 안으로 옮겼다. そして もう一度 지휘대로 나와 전고를 울리고 Dokjjeongi reul Brandishing 전투를 지휘했다. 因此, Battle 끝날 때까지 적군은 Sure. 아군도 이순신의 전사 사실을 알 수 없었다. さらには 대장선에 같이 타고 있던 이순신의 심복 군관 송희립(宋希立)도 몰랐다.
그렇게 격전이 く 가운데 그날 정오 무렵이 なろう 노량해전도 마무리가 되었다. 관음포 해역에 들어온 300여 척의 적 在 200여 척이 불타거나 Broken 被 千 名義 사상자를 내며 전멸하다시피 대패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剩下的 배 50여 척을 Led and 泗川 쪽으로 달아났다. 예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露梁海 한창 치열하게 行われる 틈을 타 Under direct 함대를 率いて 멀리 남해를 우회하고 칠천량을 거쳐 부산으로 도주했다.
처절한 Battles and the 끝난 那天 11월 19일 남해 관음포 해상은 照明 수군 장졸의 Wailing euro 떠나가는 듯했다. が 대승으로 終わった 뒤 통제사가 전사했다는 消息 一 바다는 온통 Dolorous 울음소리로 울렁거렸다. 조선군은 물론 진린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와 官兵也 울었다.
(/ ‘후기-천추의 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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